흐린 날의 단상

흐린 날의 단상

 

 

흐린 날이 좋습니다

세상을 잘 볼 줄 모르는 내 눈처럼

약간은 앞이 안 보이는 것이

어쩌면 마음 편하기도 합니다

 

눈부시게 밝은 날만 있다면

나의 이 옹졸하고 천박한 모습이나

가당찮은 욕심으로 가득한 몰골을

세상 사람들이 다 보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 흐린 오후의 끝에는 꼭

부슬부슬 비가 내리거나

아니면 흰 눈발이 풀풀 날려

뜻하지 않은 감상으로

지난날의 청춘을 관람할 수도 있으니까요

 

또한, 맑은 날에 다 하지 못한

헤진 풍경을 손질하는 일이나

무모한 속도가 남기고간 상처를 깁는 일도

이 흐린 날엔 제격이 아닙니까

 

삼백 육십 오일이 다 흐리지도 않고

그 많은 날들이 다 맑지도 않은 이유를

한 해가 저물고 있는 끝자락에 서서야

이제 겨우 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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