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헬 프로젝트
| 고정임 | 2005-10-26 오전 8:51:17
막내를 데리고 외출했다가 아주 불쾌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길에서 만난 그녀 때문이었다.
"어휴, 얘가 막내야? 아들 딸 다 있는데 뭐하러 또 낳았어?"
거의 1년 만에 만난 그녀가 기껏 하는 인사가 그랬다.
"뭐하러?"
무례한 말에 어이없어 하는 내 표정을 보고 그녀는 미안했는지 "아이가 잘 생겼다"는 입에 발린 칭찬을 하면서 총총히 자리를 떴다. 아들과 딸이 다 있는데 셋째를 낙태시키지 그랬냐는 말로 들려 몹시 화가 났다.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것도 아닌데 어엿한 부인네에게 공공연히 낙태를 운운하는 그녀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오래 전에 그녀가 자신은 셋째를 지웠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녀에게서 떳떳지 못한 일을 애써 감추고 오히려 당당하게 포장하는 낙태 증후군이 느껴져 안쓰러웠다. 그녀를 만나고 오면서 "라헬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라헬", 그녀는 성서 속에 등장하는 여인으로서 형과 장자권 다툼을 했던 야곱의 첫사랑이다. 야곱은 첫눈에 그녀에게 반해서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오빠의 명대로 하인이 되어 7년을 일한다. 그러나 결혼 첫날 밤에 오빠의 계략으로 언니가 대신 신방에 들고 만다. 라헬은 다시 7년을 더 기다려 요셉과 결혼하였고,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자식을 낳지 못해 괴로웠다. 그래서 자신의 몸종을 시켜 남편의 대를 이으려 할 정도로 언니와 자식 경쟁을 한다. 자식은 남편 사랑의 화신이요 자신의 미래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두 아들을 얻는다. 하지만 남편이 오랜 타향살이를 마치고 귀향할 때 막내를 출산하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고통을 헤아리듯 성서는 자식 잃은 라헬의 고통을 나라 잃은 이스라엘의 고통에 비유했다. 아이를 낳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식 잃은 이의 고통이 어찌할지 알 것이다.
"라헬 프로젝트"는 자식 잃은 어머니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낙태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여성을 돕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수 년 전에 그 프로젝트에 봉사자로서 참석했을 때, 거기서 낙태 후 우울증으로 울고 있는 많은 "어머니"들을 보았다. 낙태 경험자들은 태아는 자기 몸에 생긴 한 조직이 아니라 분명 사람이고, 낙태가 곧 태아 살해란 것을 알게 된 후 자식을 죽인 어머니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은 대부분 우울증, 자기 부정, 무기력감, 분노 등의 감정을 겪었다. 그녀들은 자신 뿐 아니라 자녀를 원하지 않은 남편, 시집 식구, 시술 전에 낙태의 진실을 말하지 않은 의사까지 미워하고 있었다.
이처럼 자신과 이웃 모두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낙태 여성들은 올바른 부부 생활이나 사회 활동이 어려웠다. 간단히 수술 한 번으로 임신과 출산.육아의 귀찮음과 경제적 어려움을 덜었다고 생각했지만 수술 이후에 점점 불행으로 빠져들었다. 자신의 행복을 지켜줄 줄 알았던 낙태 수술이 결국 자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씨앗이었던 것이다.
라헬 프로젝트는 이런 여성들이 눈물을 그치고 자신이 벌인 일을 정확히 알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결심하게 하고, 자신과 이웃을 용서한 다음엔 그들과는 달리 울 줄 모르는 어머니들에게 생명의 문화를 전파하게 가르쳤다. 실의에 빠진 낙태 여성들을 돕는다든가, 낙태 후에도 생존한 아기들(대부분 기형아) 돕기 같은 아름다운 일에 동참하게 했다. 그런 일을 통해 거듭난 여성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그 프로젝트에 참가했다가 "낙태는 여성의 권리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하게 되었다.
이웃에 세 아이의 엄마인 선배가 산다. 선배가 셋째를 임신했을 때 그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주위의 시선이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아들 둘 씩이나 있는데 무슨 자식을 또 낳으려 하냐는 것이었다. 울 줄 모르는 어머니들 때문에 선배는 그 말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낙태의 유혹 앞에 섰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선배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큰 유혹을 물리치고 낳는 아기이니 이담에 분명히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라며 축복의 인사를 건넸다. 진심이었다. 출산을 축하하러 갔을 때 선배는 아기에게 기분 좋은 말로 날 소개했다.
:아가야, 이 아줌마 목소리 기억하지? 이 아줌마 덕분에 네가 태어났단다. 아줌마 덕분에 우리는 자손이 번창한 집이 되었다, 그치?"
울 줄 모르는 라헬 때문에 세상 못 볼 뻔했던 셋째가 때마침 빙긋 웃었다. 그리고 2년 후 내가 뜻하지 않게 셋째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그 선배도 내게 똑같이 해 주었다. 그 때 우린 서로의 집안을 번창하게 했다며 한껏 웃었다. 선배의 아기는 벌써 여섯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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