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화꽃 이야기
| 황금숙 | 2005-10-29 오전 10:23:23
국화꽃 이야기

어린 시절 살았던 산골짜기 시골집 앞마당에 장독대가 있었다. 그 옆에 봉숭아며 맨드라미, 글라디올러스 등 갖가지 꽃들이 예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더 눈길을 끈 것은 뒷마당에 널찍이 꽃밭을 이루고 있는 국화였다. 처음에 한 무더기 심은 것이 해마다 새끼를 쳐서 그 면적이 자꾸만 넓어져 뒷마당은 온통 국화 밭이었다.
국화 싹이 파릇파릇 올라오기 시작하면 벌써부터 만개한 국화를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우리 집이 여느 집과 달리 뒷마당이 앞마당보다 아주 넓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작은 오빠가 불장난을 하다 초가삼간을 모두 태운 뒤 앞마당에 집을 지어서 그 집터가 고스란히 뒷마당으로 남은 것이다. 그래서 뒷마당이 쓰임새가 많아 해가 좋은 날은 헛간의 거름을 내다 널기도 하고 엄마가 숯불을 피워놓고 길쌈을 하기도 했다.

국화가 만개하던 지난 가을날, 우리 아파트에서 주민화합 차원의 '한마음 체육대회'가 열렸다.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 상품은 협찬도 받고, 후원도 받았다. 제법 푸짐한 것으로 준비하고 입장객한테는 복권 발행을 하여 모자란 행사 비용을 보태기도 했다.
그날의 백미는 주민 전체가 참석하는 O.X 퀴즈이다. 상품도 무시할 수 없는 김치냉장고이다 보니 경쟁이 치열하다. 그런데 우리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휴지 한 통 못 받고 빈손이다.
"왜 우리는 아무 것도 못 탔지."
남편도 아쉬워 했다. 빈손이 허전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인데 하루 종일 온몸으로 각종 경기에 참가한 남편이 안쓰러웠다.
"저렇게 공짜로 얻다시피 해서 선물 가져가는 사람은 평소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덕을 쌓았거나, 남에게 봉사를 많이 해서 저런 기회에 우연을 가장해 보상을 받는 거야.ꡓ
"나도 밖에 나가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럼 다음엔 당신한테도 차례가 올 거야."
남에게 베풀면서 대접 받기를 바라고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면 베푼 공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베푸는 순간 이미 보상을 받은 것이다. 뿌듯하고 행복한 마음이 그 대가이다.
남편은 집에 들어서자 피곤하다며 저녁도 안 먹고 먼저 자겠다고 했다. 나도 응원하랴, 애들 챙기랴 운동장을 오갔더니 피곤해서 꼼짝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저녁은 대충 시켜 먹을까 했더니 애들은 밖에 나가서 먹는 것이 더 좋다며 자꾸 졸라대는 게 아닌가. 하는 수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아이들과 다시 집을 나섰다.
막상 나왔으나 분식집은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고, 피자 햄버거는 내 식성이 아니고 갈비집이나 회, 감자탕 등은 남편 없이 가기가 망설여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먹을 곳을 찾아다니는 내가 처량했다. 밥 한 끼 먹으러 나와서 애들하고 내가 이게 무슨 청승인지 모르겠다. 몸은 지칠 대로 지치고, 배도 고파오고 갈 곳은 없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애들이 배고프다 힘들다 소리 대신 상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조명에 더 관심을 두었다. 이대로 밤새 헤매고 다녀도 좋을 것처럼……. 낮에 다니던 낯익은 길들이 밤에 나오니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 것에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밤거리만 구경하고는 아이들을 설득해서 슈퍼로 발길을 돌려 식료품을 샀다.
그래도 왠지 허전한 기분은 가시지를 않고 발걸음이 자꾸 무겁게 느껴진다.
그때 마침 평소 사고 싶었던 노오란 국화가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게 아닌가?
"그래, 밥도 못 먹고 들어가는데 그 돈으로 꽃이라도 사는 거야!"
꽃집 문을 여니 애들도 서로 자기가 고르겠다면서 좋아한다. 제철이라 그런지 싸고 예쁘다. 국화도 여러 종류에 색도 가지가지다. 그 중에서도 노란색 국화가 단연 돋보였는데 청원이가 골랐다. 그리고 공작이라고 하는 보라색 국화를 혜원이와 내가 고른 것이다. 꽃을 좋아하는 두 아이의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집에 와서 작은 항아리에 풍성하게 다 꽂고, 떨어진 꽃은 책갈피에 꽂아서 누름꽃을 만들었다. 국화향이 참으로 진하다. 길게는 20일 이상 꽃을 볼 수 있다고 하니 간단하게 저녁 한끼 때울 만하다.
작년에는 같은 값이면 실속 있는 것으로 한다고 국화꽃이 어느 정도 피어 있는 화분으로 몇 개 샀다. 국화는 다년생이라 두고두고 키우면서 새끼쳐서 분양도 하고, 꿈을 열심히 키웠는데 어쩐 일인지 다들 죽고 말아서 화분만 처치 곤란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실속(?) 있는 것으로 골랐다.
다른 집들은 몇 년씩 잘도 키우는 것을 나는 관엽이고 화분이고 제대로 키우질 못한다. 우선은 보기 좋아 오며가며 충동 구매를 했다가도 정작 그것들이 적응을 못하고 시들어 나갈 때는 나도 속상하다.
인디언들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영혼이 있으며, 생명이 있다고 한다. 돌이나 땅 등 생명이 없어 보이는 것에도 생명력이 숨어 있다고 하니 하물며 피고 지는 꽃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마음을 쏟고 정성을 들인다면 그것들도 그럭저럭 버티기야 하겠지. 어쨌거나 이왕 내 집에 온 것 잘 키워 보지도 못하고 내보내는 것은 다 내 불찰이 아니겠는가.
목이 마르면 나는 걸어서 물을 찾아 적당한 양을 마시고 해갈을 하지만, 뿌리 내리고 화분에 갇혀 있는 저로서는 목이 말라도 누군가 주지 않으면 안되고 설령 준다고 해도 그것이 적당한 양이 아니고 많거나 적으면 괴로움에 시달릴 것이다.
식물과 교감이라도 한다면 모를까 무엇을 어떻게 해 주어야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는다. 정성을 들이면 그 값이야 하겠지만 아직은 공들여야 할 것이 그것 말고도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먼 훗날이나 되어야 한가하게 꽃나무 잎사귀 한 장이라도 정성으로 닦아 줄 수 있을 것 같다.
매일 물을 갈아주면 꽃병에서 20일은 간다던 국화는 일주일도 견디지 못했다. ꡐ화무십일홍ꡑ이라는 말도 있는데 뿌리도 없는 것이 무슨 수로 스무날을 버틴다는 것인지 곧이들은 나도 그렇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 사람들의 말도 뭐 새삼스러울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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