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색 원피스
아이들은 덥다고 반팔을 찾는다. 며칠 전부터 여름옷을 꺼내야지 하면서도 늑장을 부리고 있다. 왜 이리 계절은 빨리 바뀌는지 봄인가 싶으면 벌써 여름이 와 있다. 철이 바뀔 때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를 한번씩 원망해 본다. 얇은 옷을 꺼낸 지가 엊그제인데 또 짧은 옷들을 찾아야 한다.
서랍장을 열어 빼곡하게 들어찬 옷들을 꺼내니 금방 한 무더기가 쌓인다. 아이들 것을 대충 추스르고 남편 옷과 내 옷을 끌어당긴다. 개켜진 옷들 사이에 쑥색 원피스 한 자락이 삐죽 나와 있다. 빼내어 죽 펼쳐 보니 접혀져 있던 자리에 굵직한 주름들은 잡혀 있지만 색은 그대로다. 큰아이를 가졌을 때 입던 임신복이니 훌쩍 십 년은 지난 옷이다. 이 옷을 입지도 않으면서 남을 주지도 못하고 긴 세월을 서랍 속에다 간직해 두었구나.
스물일곱, 그다지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결혼하면 당연히 생겨야 하는 줄 알았던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일년이 지나자 주위 사람들의 걱정하는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아이가 없어도 그냥 즐겁기만 하던 날들도 지나갔다. 때가 아닌가 보다 하고 느긋하게 기다려보려 했는데 갈수록 초조해졌다. 그렇게 또 한해가 갔다.
서울의 유명한 불임클리닉을 다니기 시작했다. 병원은 여느 곳 같지 않고 카페처럼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의사나 간호사들은 심란한 마음을 위로라도 해 주는 듯 따뜻하고 친절했다. 결혼한 부부 열 쌍 중에 한두 쌍은 불임이란다. 내 주위에는 모두 다 아이들 데리고 다니는 아줌마들만 있는데 병원에 가니 다 아이 못 갖는 사람들만 있다. 거기에는 참으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슬픈 사연들을 가진 전국 사람들이 모였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주눅들고 서러워 해보지 못한 이야기들도 스스럼없이 모두 토해 냈다. 차례로 여러 가지 검사들을 했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더욱 어렵단다.
친정 부모님께는 몇 년째 제일 큰 걱정거리를 안겨드린 셈이었다. 딸은 시집가서 아들을 하나 낳아 놓아야 마음을 놓는다는데 딸 하나도 못 낳고 있으니 오죽했으랴. 어머니는 날마다 하느님과 부처님, 삼신할머니에게까지 빌었을 것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흰접시꽃 뿌리를 보냈다. 닭 파는 시장에 가서 살아 있는 흰닭을 잡아다가 푹 삶아 먹으라고 했다. 그 뒤로도 잊어버릴 만하면 한번씩 보내왔다. 우리 집에는 접시꽃이 없는데 어머니는 그 많은 뿌리를 동네마다 다니면서 사정사정하여 구했을 것이다.
차츰 외출도 줄어들고 성격도 바뀌어 갔다. 남편 친구들 모임에는 할 수 없이 따라 나서지만 우울하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두 해 사이로 비슷하니 결혼을 한 남편 친구들은 아이들이 다 그만그만했다. 아이들 이야기 아니면 할 말이 없는 듯이 온통 그 이야기다. 남자들이 앉아 있는 쪽에 귀를 기울여봐도 아들 딸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말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할말이 없어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내 가슴은 먹먹했다.
그 때 우리 앞집에는 아들만 둘을 둔 가족이 살았다. 만날 아이들 등쌀에 못살겠다고 소리 질러대는 아줌마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저녁 퇴근 무렵이면 앞집 아저씨는 ꡐ아빠다ꡑ 하면서 벨을 눌렀다. 그러면 서로 문 열려고 한데 어울려 굴러 나오는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다시 한바탕의 소란스러움이 지나간다. ꡐ나야ꡑ 하면서 문을 여는 남편에게도 큰소리로 ꡐ아빠다ꡑ 하면서 들어올 날이 있을까 싶게 막막한 날들이었다.
펑펑한 임신복을 입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임신복 매장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남산만한 배를 내밀고 다니는 여자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은 가득했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려졌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왜 그리 입덧하는 여자들이 자주 나오는지 슬그머니 리모콘을 눌러버렸다. 그러면서 나도 아이만 생겨봐라 남편 앞에서 보란 듯이 헛구역질도 하고 예쁜 옷도 원없이 사 입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을 했다.
흰접시꽃 뿌리 때문이었는지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었는지 기적처럼 아이가 생겼다. 메스꺼움으로, 생명은 그렇게 느닷없는 입덧으로 시작되었다. 멋진 임신복은 다 사 입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쇼핑백을 하나 들고 왔다. 내가 지나치기만 했던 만만치 않은 가격의 임신복이 들어 있었다. 그 동안 내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았다.
방안 가득 정리하려던 옷을 놔두고 쑥색 원피스를 다렸다. 잡혔던 주름들이 펴지면서 이 옷을 입고 행복해 했던 시간들이 지나갔다. 다 다려 놓으니 아직도 새 옷 같다. 옷을 입고 거울 앞으로 갔다. 아직도 임신 중인 것처럼 딱 맞다. 땀 범벅이 되어 우당탕탕 들어오는 아이들이 잠시 옛 생각에 빠져 있는 엄마를 깨워 놓는다.
"엄마 옷 예뻐?"
쓱 한번 쳐다보고 만다. '저런 멋대가리 없는 녀석들이라니.'
아이들은 긴팔을 벗어 던지고 집히는 대로 여름옷 하나씩을 입고 다시 나간다. 아이들이 나간 그 자리에 땀 냄새가, 아니 아이들 냄새가 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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