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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희 | 2005-10-29 오전 10:26:02


또랑또랑한 쫀득임이 딸아이의 종아리를 만지는 것 같다. 손끝이 황홀하다.
껌을 씹어본 지가 언제였던가 싶게 아득하다. 단물을 빼고도 버리기 아쉬운 마음에 한참 손장난을 한다. ꡐ또또똑- 또또똑-ꡑ 내 마음에 쏙들게 재롱도 잘 부린다.
'아, 고것 참 재밌네?'
어릴 때에 우리는 껌을 만들기 위해 자주 산에 올랐다. 물론 땔감으로 쓰는 나무등걸과 솔가리를 긁어오기 위해서다. 그때마다 빠지지 않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어진 일에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그 어렵던 시절에는 놀잇감과 먹을거리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산에 올라가 깨금과 멍가이, 머루, 다래 등 산열매를 따먹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송진으로 껌을 만드는 것은 즐거움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우리는 산에 오르면 나무하는 것보다 먼저 소나무를 찾았다. 말랑한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서다. 너무 딱딱하거나 묽으면 씹을 수가 없다. 그러니 좋은 껌을 만들기 위해서는 손으로 만져보아 묻어나지 않는 것으로 잘 골라야 한다. 한덩이로 뭉쳐진 송진을 그 다음에는 입 속에 넣고 잘 씹어야 한다. 처음에는 진한 향으로 역겹기만 했다. 그렇지만 계속 씹으면 씹을수록 강했던 향이 적당한 체온과 침으로 길들여져 순하게 느껴졌다. 그쯤 되면 껌의 형태를 지니게 된다. 그렇다고 근사한 풍선이 불어진다거나 딱딱- 소리가 나진 않았다. 그저 말랑함과 쫄깃함으로 씹는 놀잇감으론 제법이었다.
놀잇감이 없던 시절 이렇게 만든 껌은 훌륭한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밀을 가지고도 껌을 만들 수가 있었다. 학교를 오가는 들녘엔 보리보다도 훨씬 큰 키의 밀밭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출렁이는 밀밭이었다. 일부러 산에 올라가지 않아도 쉽게 껌을 만들 수 있는 보고(寶庫)였다. 밀 몇 가닥을 잘라 밭고랑이나 풀섶에 앉는다. 집에 가서 동생을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까맣게 잊은 채 껌 만드는 일로 해 가는 줄 몰랐다. 길음길음한 밀꺼럭을 뜯어내고 두 손으로 비벼서 껍질을 벗겨내어 호호 불어낸다. 이것이 바로 현밀이 된다. 많은 양을 만드려면 입 안 가득 씹어야 한다. 야무지게 잘 익은 밀보다 푸른 기가 있는 덜 익은 것으로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양은 적게 나와도 씹기에 수월했기 때문이다.
입 속에서 우걱대던 알맹이가 침과 섞이어 잘게 부스러지면서 서로 엉기는 매끄러운 것과 까실거리는 껍질이 분리된다. 이것을 도랑물에 헹구어 껍질을 떼어내고 다시 씹는다. 남아있는 껍질을 떼어내기 위해 씹고 헹구는 일을 서너 번 하다보면 하얀 덩이만 남았다. 씹을수록 인절미처럼 찰졌다. 구멍은 생기지만 혀로 펴지기도 하고 풍선 부는 흉내도 낼 수 있는 근사한 껌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렇게도 좋아했던 껌을 어쩌다 손님이 사오거나 이웃 친구한테 얻게 되는 날이면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만들어 씹던 감촉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보드랍고 매끄러웠다. 네모 반듯한 풍선껌의 희디 흰 색깔은 언제 보아도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그 껌이 어찌나 소중했던지 잘 보관하기 위해 나는 아버지 담뱃갑을 생각했다. 담뱃갑 속에 있는 은박지는 껌이 달라붙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은박지에 쌌다 풀었다 했던지 모른다. 흰색이 까매지도록 며칠을 씹고 씹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입이 아프도록 씹던 껌은 밥 먹을 때엔 밥상 밑에 붙였다. 그런가 하면 공부할 때엔 필통 뚜껑이나 책상 아래에, 잠을 잘 때엔 등잔대나 벽에 붙여놓았다. 이렇게 붙이는 장소를 일정하게 해야 하는데 어른들 몰래 한다고 엉뚱한 곳에 붙이면 간혹 그곳을 잊어버려서 찾는 일이 많았다.
벽에 붙이면 뗄 때마다 벽지로 붙였던 신문지도 함께 묻어 떨어졌다. 그래서 껌을 붙였던 자리마다 글씨 없는 흠집이 군데군데 생겨났다. 나 또한 잉크 냄새나는 신문지껌을 씹어야 했다. 가끔은 잠결에 잘못하여 흙벽에 붙이는 바람에 그 다음날에는 어석대는 황토흙껌을 씹어야 했다. 껌은 씹을수록 굳어서 딱딱해진다. 그러니 흙냄새가 날지언정 그래도 아직은 말랑거림이 좋았다.
신나게 뛰어논 날은 어김없이 껌을 입에 물고 그냥 잠들고 만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껌이 머리에 엉겨 붙거나 옷에 눌러 붙어서 난감했다. 온종일 툇마루에 앉아 손으로 뜯어내는 일을 감수해야 했다. 때론 머리카락을 듬성듬성 잘라내는 일도 엄마 몰래 스스로 해야 했다. 동생들과 서로 돌려 씹던 귀하고 소중한 껌이 등에서 보채는 막내 동생의 입에 넣어지면 씹는 시늉을 하며 입만 지키고 있어도 어느새 ꡐ꿀꺽ꡑ 삼켜버려 아쉬움으로 발만 동동 구르게 하지 않았던가.
그때 우리는 처음의 달콤함 외엔 별 맛도 없는 것을 왜 그리도 애지중지하며 아꼈을까? 아마도 그것은 손쉽게 구하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때와 비교하면 요즈음은 그 많은 슈퍼마다 껌 진열대가 없는 곳이 없다. 커다란 진열대엔 수십 종류의 껌들로 가득하다. 이젠 단순히 씹는 놀잇감이 아니다. 입냄새를 제거하는 껌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충치예방을 위한 껌까지 있다. 이렇게 지금의 껌은 다양한 기능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 현대를 살아가는 문화인의 필수품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전철역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수만큼이나 문화인들의 양심이 버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어제의 우리들 어린 마음을 알 리 만무다.
'또또똑-'
기포를 머금은 껌이 제법 큰 소리를 친다. 홍수처럼 범람하는 물질 속에서도 어린 날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고.
아이들 생각을 훔쳐보며 나는 싱크대 밑을 살짝 들여다본다.
'어디쯤에 껌을 붙여놓을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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