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세탁
| 조귀순 | 2005-10-29 오전 10:29:50
돈세탁

11층에서 인터폰이 왔다.
"바깥 날씨도 우중충한데 특별히 바쁘지 않으면 차나 한 잔 하러 와요."
목소리가 꼭 왔으면 하는 느낌이다. 올라가 보니 11층 여자는 바깥 날씨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한 밝은 표정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날씨에 기분을 맞추는 것은 아니지만 우중충하고는 전혀 먼 거리에 있었다.
나는 환절기에다 약간의 피로가 겹쳐 있었다. 몸살 기운이 있었던 때였다. 따끈한 녹차 한 잔을 받아 놓고 있는데 그녀는 자꾸만 싱글벙글거린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궁금하기도 하고 또 이야기를 풀어줘야 할 것 같아 조바심을 냈다.
"무슨 일이야? 뜸들이지 말고 말해 봐요."
그녀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키더니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는 말부터 한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남편 돈세탁 했잖아."
그녀의 어이없는 대답에 놀라 몸살 기운이 순식간에 다 빠져나간 듯하다. 남편이 은행원이라더니 말로만 듣던 일이 실제로 가능한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서너 해 전이던가. 일부 정치인들과 재벌들 사이에서 실명제를 피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가며 출처를 밝힐 수 없는 돈을 빼돌렸었다.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돈세탁이 아니던가? 그런데 오늘 바로 가까운 이웃에서 그 얘기를 듣게 된 것이다.
나는 놀란 것인지 흥미로운 것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얼마나,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왜 그 순간 ꡐ얼마ꡑ라는 숫자에 그토록 민감했을까? 그 다음에서야 남편은 직장에서 괜찮냐고 물었다. 완전히 마무리는 잘 됐느냐고 궁금한 게 일시에 솟구쳐 올라 계속 질문만 했다.
그런데 그녀는 태연했다. 아직까지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괜찮다는 것이었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실직자는 안 될 것이라 했다. 그녀는 이야기가 길어지면 안 될 듯이 화제를 바꾸었다. 주말에 시골 다녀온 이야기를 끌어냈다.
"어제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일요일에 할 일이 고스란히 남았어."
전업주부지만 월요일에는 나름대로 바빠 은근히 마음 밖으로 짜증이 배어 나온 모양이었다. 작은애마저도 제때에 일어나지를 못해 더 정신이 없었단다.
그런데 다행히 남편이 서둘러 일어나 청소기를 돌리더란다. 정리까지 깨끗이 해주고는 빨랫감도 세제를 풀어 넣어 아예 전원 스위치까지 켜 주었다나. 피곤할 테니 빨래가 다 될 동안만이라도 조금 더 누웠다가 널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공돈이 생겼다더니 이번에는 자상한 남편이라고 자랑을 했다. 그녀의 남편이 가정에 충실한 것은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도 은근히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궁금한 것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일에 대해서 더 이상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대부분의 소시민들이 늘상 부족한 게 돈이 아니던가. 설령 여유가 있다 해도 다른 게 아닌 현금이 공것으로 생겼다면 유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가겠다고 일어나니 그녀가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간다. 어제 시골에서 가져온 것이라며 산나물 몇 가지가 담긴 봉지를 내밀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주는 사람의 기분을 최상으로 좋게 해 주었을 것이다. 덜 좋아하더라도 무척 좋아한다고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그런 말이 우러나오질 않았다. 잘 먹겠다는 말 한마디로 간단히 끝을 냈다.
다 해진 슬리퍼에 발을 들이밀며 힘 빠진 손으로 현관 문고리를 돌린다. 그런데 그녀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다. 남은 심술이 나는데 혼자만 저렇게 좋을까? 곧바로 안방으로 들어갔던 그녀가 손을 뒤로 감추고 나왔다.
"이왕에 말 나온 것 보고 가야지, 우리 남편 돈세탁 한 것 말야. 내가 점심도 사줄게."
그러면서 만 원짜리 네댓 장을 거실에 뿌리는 게 아닌가. 나는 화가 났다. 그런 사람으로 보지 않았는데 돈 좀 생겼다고 이러다니…….
그녀는 싱긋 웃더니 내 팔을 잡아 당겨 앉혀 놓고는 "사실은……" 하면서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남편이 아침에 주머니 확인을 하지 않은 채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었다고 했다. 그녀는 빨래가 다 됐다는 삐-하는 귀청 떨어질 듯한 소리를 듣고서야 어기적거리며 걸어가 세탁기의 뚜껑을 열었단다. 성능이 좋지 않아 빨래가 다 엉켜 있었다.
"어이구, 이눔의 세탁기. 언제나 바꾸나."
짜증스럽게 빨래를 터는데, 순간 만 원짜리 돈이 우수수 떨어지더란다. 그 바람에 신나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빨래를 널었다나. 그런데도 즐거운 마음이 가시질 않아 나를 불렀다는 것이다.
"남편의 확실한 돈세탁에 횡재했잖아."
어떤 부류의 사람들처럼 과연 그녀는 이 돈을 혼자서 가질 수 있을까? 만 원짜리 몇 장에도 마냥 행복해하는 평범한 그녀가 너무나 아름답다. 흐렸던 하늘에 구름이 어느새 걷히고 거실 가득 햇살이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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