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가위
| 조영애 | 2005-10-29 오전 10:27:56
한가위

일년 중 한가위만큼 풍성할 때가 없다. 이때쯤 시골의 하늘은 도시와는 달리 높고 푸르기만 하다. 금방이라도 채색되지 않은 파란 물감덩이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하늘이다. 추수를 기다리는 곡식들은 으쓱으쓱 어깨를 들추며 춤을 추고 튼실한 과실은 반짝이며 가을 햇살과 눈 맞추기를 한다. 추석을 쇠러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은 푸근함에 푹 빠지고 싶다. 그런데, 이런 가을 풍경에 젖어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은 며느리라는 내 직분이다. 얼른 마음을 추슬러 허리춤 뒤로 살짝 감춰두곤 한다.
형님이 농사일을 하고 계시다. 막내인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심부름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시집을 온 지 삼 년째를 맞는 막내며느리인 나는 별 손색이 없으리라고 자부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옥에도 티가 있듯 설날이면 별문제 없이 잘 지냈지만, 추석이 돌아오면 언제나 나를 어렵게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송편 빚기였다.
추석 송편은 아무리 잘 빚어 보려 노력을 해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가 않았다. 하기야 일년에 한번 하는 행사이니 잘 할 리가 만무한 일이다.
형님이 익반죽을 해서 잘 치댄 떡쌀가루는 말랑말랑한 것이 아기 볼때기 같다. 하지만 그것이 내 손에 닿기만 하면 우수수 부서지기가 일쑤다. 콩기름을 살짝 손에 묻혀 조물조물 해본다. 그런데 이번엔 속에 얌전하게 들어있을 콩소가 쏘옥 쌀가루를 벌리고 얼굴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정말 어렵고도 힘든 일이 되어 버린다.
반면에 형님은 송편 빚기 대회에 나온 사람처럼 쪽 고른 크기로 예쁘게 만들었다. 한 줄로 고르게 맞춰 놓은 뽀얀 송편을 보면 감탄사가 나옴직도 하지만 은근히 그런 형님의 솜씨를 보면 속이 상해온다. 게다가 이 일 저 일로 왔다 갔다 하시는 시어머니는 내게 감시자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급기야 한 말씀 하셨다.
"막내야 너는 송편을 그렇게 못 만드냐? 그러니 딸이 못 생겼지."
그러잖아도 속이 편칠 않는데 그런 어머니의 말씀에 품고 있던 열기가 머리카락 끝까지 뻗쳐 올라가는 것을 느끼기에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손녀를 보고 못생겼다고 하실 수가 있을까? 정말 너무 하시는구나 하고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 이 자리를 모면할 방법을 찾곤 했다.
급기야 나는 아이들과 함께 송편을 찔 때 찜 솥바닥에 깔 연한 솔잎을 따러 가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바람이라도 쐬면 속이 좀 후련해질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산에 올라서도 좀처럼 속은 풀리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예쁜 딸인 것 같은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집와서 세 번째 맞는 추석은 그렇게 송편으로 인해 기분이 상한 상태로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해부터는 형님께 협상이 아닌 양해를 얻어냈다. 송편은 도저히 빚지 못하겠으니 부침과 튀김은 혼자서 다 하겠다고 말이다. 신나는 일일 수밖에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어서 더 좋아했을 게다.
추석을 넘기고 다음해 매서운 꽃바람이 부는 봄날이었다. 이른 아침 급한 전화울림 속에서 시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아주버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전 안부전화 드렸을 때도 마을 회관으로 놀러 다녀오셨다고 했건만 이게 무슨 일인가.
허겁지겁 시골집에 도착한 남편과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뇌졸증이라고 했다. 눈을 감으시고 똑바로 누우신 채로 가쁜 숨만 푸우푸우 내뿜으셨다. 왜 이렇게 누워 계시냐며 아무리 흔들어보아도 별다른 반응이 없으신 것이다.
혈압이 높으신 어머니는 평소에도 항상 주의를 하시며 약을 드셨었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시다가 쓰러지셨다는 것이다. 병원으로 옮겼으나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태라 집으로 모셨다는 것이었다. 하루종일 어머니 옆에서 지켜 앉아있었지만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숨소리가 점점 가빠지는 걸 느끼면서 내 목구멍 안쪽까지 침이 말라버려 입 안에서는 사그락사그락 소리와 단내가 났다.
그 날 저녁을 넘기시지 못하고 어머니는 영혼을 멀리 떠나 보내시고야 말았다. 병풍으로 우리 자식들과 가르는 과정에서 난 실신을 했었나보다. 정신을 차리니 다른 방에 누워있었다. 발인제를 지내고 집에서 가까운 문중산에 어머니를 모셨다.
상여꾼들도 다 돌아간 봉분 옆에 형님과 나만 남았다. 잔디보다는 황토 흙이 더 많은 붉은 봉분을 쓰다듬던 형님은 철퍼득 앉아 통곡을 하였다.
한참을 울다가 진정을 하시더니만 말했다.
"아이고 어머니 눈뜨지 않고도 그대로 누워 계셔도 한달 만이라도 있다 돌아가시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저것이 진정한 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니라는 이유로 이해하기보다는 반감을 샀었고 별스럽지 않는 말 한마디에도 서운하다고 먼저 단정지어버리곤 했던 내가 아니던가. 문득 지난날의 작은 일들이 죄스러움으로 몰려왔다. 마음에서 우러나 잘 해드린 일이 있었는가. 친정엄마와는 늘 다르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산을 내려오면서도 몇 번이고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저녁노을은 묘 뜰에 가득 내려앉았다. 고요한 밤이 되기 전이라 황혼은 더 아름답다.
추석이다. 소나무 숲이 꽉 들어찬 산길을 따라 어머니께 어김없이 문안 인사를 드린다. 묘 뜰에 잡풀도 뽑고 다닥다닥한 까만 풀씨도 훑어다가 봉분과 뜰에 고루 뿌렸다.
"어머니 잘 보세요. 어머니 손녀가 폴짝폴짝 잘도 뛰지요. 정말 점점 예뻐지고 있어요. 그리고 저도 이젠 송편 빚기도 잘해요."
어머니가 지금까지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손녀딸이 잘 자라고 있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은데 말이다. 하늘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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