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크기

 

몇 년 전 어마어마한 산불로 인해 온 동네가 거의 초토화
되다시피 했던 강원도 고성 땅을 가 본 적이 있었습니다.
휴전선과 인접해 있는 적막한 산골로 개발의 손길이 미치
지 않아 더없이 아름다울 것이었습니다만 그 때는 손끝만
대어도 꺼멍이 묻어나올 정도로 산이나 들이나 모두가 시
커멓게 변해 있었습니다. 눈 끝이 가는 대로 아무리 고개
를 돌려도 황량하다 못해 앙상한 폐허요, 동해바다가 출렁
이는 모래밭 해송까지 까맣게 그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마가 쓸고 간 참담한 현장, 도무지 생명의 씨
라고는 한 톨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던 그 땅에서 원망의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숯덩이를 밀고 올라오는 노란 새싹
을 발견하고는 정말이지 그 경이로움에 가슴 뭉클하다 못해
감당하기 힘든 흥분을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생명의 신비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 하나까지 타 버린 그
버림받은 땅에도 죽음이란, 그리고 좌절이란 결코 존재하
지 않았던 것이지요. 오직 부산한 생명의 웅성거림만이 황
량한 벌판에, 나뭇가지에, 바위틈에 가득가득했습니다. 아
마도 지금쯤은 산이나 들이나 제법 푸른 치마를 두르고 멀
리 해풍을 타고 들어오는 상큼한 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깨를 움츠리게 하던 겨울도 지나가고 설도 보름도 지
났습니다. 졸업이다 입학이다 새 학년이다 아이들도 분주
하고 삽을 메고 들로 나가는 농부들의 마음도 새롭습니다.
이제 모두의 가슴에 버들가지에 물오르듯 새록새록 연둣빛
새싹이 돋을 것입니다. 싱싱한 희망이 자랄 것입니다. 더
러는 어쩔 수 없이 고민하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도 있겠습
니다만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슴에 희망 하나
달면 충분합니다. 잿더미를 밀고 올라온 새싹도 땅 속 희
망이 자라난 것이고 3월 달이 큰 것도 바로 희망이 크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