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여
어릴 적 우리 동네 떡 방앗간에 무럭무럭 김이 오르면 참 신이 났습니다. 귓볼이 얼얼할 정도로 매서운 추위에도 땀 을 뻘뻘 흘리며 기계를 돌리시는 주인집 아저씨나 쑥쑥 밀 려나오는 백묵보다 하얀 떡가래를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내 는 아주머니, 그리고 옆에서 연신 한마디씩 거들어대는 객 꾼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곤 했습니다. 떡쌀 담긴 바구 니로 긴 줄을 세워 놓고 기다리는 틈에 우리 엄마라도 끼 어 있으면 그 미끈미끈하고 쫄깃쫄깃한 가래떡 맛을 볼 수 있다는 기대로 하루 종일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방앗간이 분주해질 때쯤부터는 동짓달 저녁해만 큼이나 짧은 거리에 있는 정류장도 붐비기 시작합니다. 평 소에는 하루 종일 한 두 명이나 타고 내릴 한적한 정류장 에 털털거리는 버스가 지나가면 한 무더기씩 사람들이 내 리곤 했습니다. 그 속에는 꼭 아버지를 따라 도시로 전학 갔던 친구나 서 울 사는 옆집 철이네 사촌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끼어 있 었고,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나는 몸이 꼬이고 그들은 어 깨가 으쓱거렸습니다. “야, 니 여기서 뭐하노?”같은 투박 한 억양이나 “얘, 너 몇 학년이니?”하는 끝이 살짝 올라가 는 얼찐말(경상도 사투리로 서울말을 이름)로 말을 걸어올 땐 참 답답했습니다. 그 어린 마음에도 촌놈이 되기 싫었 던가요.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더 촌 놈의 모습인데 말입니다. 하여튼 몇 달만 도시 물을 먹고 와도 혀가 꼬부라지는 기 막힌 현지화(?)에 감탄하면서도 내심 그들이 부럽기 한이 없었습니다. 몇 일간 그렇게 동경의 날들을 보내고 나면 설도 지나가고 방학도 거의 끝이 납니다. 그러면 밀물 빠 지듯이 사람들이 나가고 방앗간이나 정류장이나 마을 어귀 도 다시 조용해지고 차분해지지요. 그렇게 섣달과 정월이 지나면서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마음도 조금씩 자라났나 봅니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으면 꼭 새순이 돋고 세상이 푸르러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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