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어떻습니까

 

비가 오면 어떻습니까? 하늘 흐리면 비 오는 법이고 구름
일면 마음 흐린 법입니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 오늘 같은
날, 두어 개쯤 살 나간 검정 우산을 받쳐 들고 버스 정류
장으로 나가 행선지도 알 수 없는 388번을 탄들 누가 뭐
라고 하겠습니까?

유리창 너머로 흘러내리는 빗물이야 차갑겠지만 그 사이로
종종걸음을 치는 젊은 여인네의 젖은 치맛자락이야 어찌
알겠습니까, 차가운지 뜨거운지. 가방을 메고 축 늘어져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반 평짜리 리어카에 비 설거지를
하는 늙은 할아버지의 느린 거동도 온도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일 듯합니다.

더러 바람이 지나가는지 가로수 가끔 가지에 걸린 물을 부
립니다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 적막한 도심에 그래도 버
스는 가고 있을 것입니다. 마치 내가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이름이 가물가물해질 만큼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어차피 내릴 곳이 없었던 것이거늘 사이사이로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에도 귀 기울일 필요 없지만, 다만 내 앞에 나 보
다 더 마음 아픈 사람 물 흐르는 우산을 세우며 서 있다면
슬금 곁눈질로 그의 볼을 스쳐봄이 그래도 이 비 오는 날
세상에서 주고받는 아름다운 관심의 전부가 아닐까요.

그리하여 그와 함께 유리창 넓은 찻집에 들어가 헤이즐넛
향이 그윽한 탁자 위에 두 손을 내려놓고 서로의 지난 이
야기에 그 보드라운 체온을 얹어가며 작은 웃음을 주고받
는다면, 그런 꿈을 꾸다가 차창에 머리를 부딪치고 버스를
내리는 날, 그 날이 오늘 이 비 오는 날이어도.

이렇게 한 바퀴 비를 맞고 오면 혹시 압니까, 내 마음에 들
어 있던 갖은 미움들, 새까맣게 타 들어가던 그리움, 아직
도 코끝에 남아 있는 진한 그 사람의 체향, 다 잊혀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