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바람이 푸른 날, 마음을 달래듯 오래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지난날 어디서 골라 끼워 두었는지 그 색깔 그대로인 빨간 단풍잎을 만나는 반가움이 있습니다. 그러 나 아마도 가을이렸으니 하는 막연함만 있을 뿐 어느 해 어느 자리에서 만난 인연이었는지 혹은 누구와 걷다가 그 화사함에 반해 곱게 책장 속에 묻어 두었었는지 아니면 아 픈 이별의 징표로 가슴에 묻듯 책갈피에 묻었는지는 잘 생 각이 나지 않습니다. 아직도 잎 끝이 선명한 나뭇잎은 오랫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던 탓일까 가지런한 결들이 더욱 투명해지고 단정해 보이는 것이 마치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신부마냥 순결하기까지 합니다. 만지면 금방 부서질 듯 여리어 보이 지만 실은 조심스레 잎자루를 들고 이리저리 흔들어보아도 괜찮을 만큼 지나간 날들의 무게도 잘 견뎌온 것 같습니 다. 아마도 먼 시간을 건너뛰어 또 다른 세상에 나오기를 기다리며 눈부신 화사함을 캄캄한 책갈피 속에 묻고 참아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마침내 이렇게 내 손에 끌려 다시 세상에 나오기 는 하였으나 그 날의 이야기나 함께 걷던 사람의 이름이나 마주보며 멀어지던 거리의 모습조차 기억해 내지 못하는 답답한 사람을 보고, 그 날 다 채우지 못하고 떠나온 가을 이 얼마나 원통할까? 차라리 그냥 그대로 묻혀 좀 더 많은 세월을 기다린 다음 생각 깊은 사람 하나 만나 그의 가슴 에 가을 달빛에 지는 안개처럼 묵묵히 스며들고 싶지는 않 았을까? 얇아질 대로 얇아진 내 감성의 두께를 알아챈 묵은 단풍 잎을 조심스레 제자리에 내려놓으며 나 또한 누군가의 손 에 있는 고운 책갈피로 숨어들어 영원히 그의 소유가 되고 싶음은 이 가을이 너무 눈부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메말라 있다는 뜻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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