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모처럼의 휴가를 받아 낯선 도시에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린다고 저 멀리 반도의 끝자락 부산역 앞에 서 있는데
느닷없이 뒤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면, 돌아서 확인하
는 그 얼굴이 날마다 마주치던 직장 동료이거나 아니면 이
웃집 아저씨거나 하면 어떨까?
일탈의 기쁨이 무너지는 가운데 밀려오는 반가움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런저런 인사말로 서로 정리를 하고
헤어진 후, 남은 즐거움을 만끽한 다음, 저녁 나절 돌아오
는 기차간에서 좌석을 확인하다가 우연히 옆자리에서 또
마주친 그 사람, 질긴 인연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글쎄 그 사람, 어릴 적 내 살던 고
향 사람이라든가 이모와 같은 학교를 나왔다든가 하
면……. 이쯤 되면 인연도 막가자는 말씀(?)이 아닐까, 부
처님 손바닥이라든가 뛰어야 벼룩이라든가 하는 말을 떠나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 그나마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
일 만남, 참으로 기이하다 하겠다.
이런 인연만 있을까, 어느 영화에서처럼 상습 좀도둑께서
집요하게 추적하는 경찰관을 피해 이웃 동네로 이사를
갔는데 이발소에 가면 이발소에서, 슈퍼에 가면 슈퍼에서
어김없이 기다리는 경찰관, 머리를 쓴다고 한참 계산해서
질러갈 길을 돌아가고 버스 탈 것을 택시를 타고 가도 어
김없이 앞에서 어정거리는 그 경찰관(알고 보니 자기를 쫓
아온 것이 아닌데), 이 정도 되면 그 질긴 악연도 운명이라
고 해야 할 것이다.
운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침에 자고 나면 내 곁에, 출근
을 하면 앞자리에, 차를 타면 옆자리에 그리고 저녁 해거
름엔 그의 가는 손목이 언제나 내 손 안에서 행복한, 그런
황홀한 인연 하나 있다면 빗소리에 축축한 이 6월도 내게
는 아름답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