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처음
봄꽃의 대미는 아마도 철쭉이 장식하는 것 같습니다. 개 화의 등고선을 따라가 보면 제암산에서 시작한 철쭉은 지 리산을 지나 여름의 경계인 5월 말이나 6월 초, 소백산과 태백산에 그 분홍 꽃물을 흐드러지게 풀어놓습니다. 저 남 쪽 바닷가에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트리며 시작한 개화의 향연이 장엄한 마감을 하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참 좋은 날들입니다. 아리고 긴 겨울을 참아 온 보람처럼 햇살이 드는 담장 밑을 노랗게 물들이며 화사 한 웃음을 던지던 개나리나, 내 첫 여자의 저고리 같은 고 아한 모습의 자목련이나 죽은 남자의 무덤을 지키다가 피 맺힌 슬픔이 꽃잎에 닿아 붉은색이 되었다는 진달래나, 슬 픈 영화처럼 바람에 몸을 맡기고 떠다니던 벚꽃이나 모두 화무십일홍의 짧은 날이었지만 청춘처럼 뜨거웠습니다. 철쭉으로 인하여 그렇게 짧은 봄이 가고나면 내겐 마음 만 무성한 여름이 시작됩니다. 짧아진 소매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하얀 팔이 더욱 눈부시게 빛나고 갸름한 턱선 아래 목은 더 길어집니다. 맑은 눈동자엔 바람이 하늘거리고 복 숭아털이 소복한 코끝에는 언제나 싱그러운 풀내음이 매달 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꼭 한번은 가까이에서 맡아보고 싶은 그녀의 향기가, 단 한번만이라도 내 목젖을 스쳐 갔으면 하는 그 녀의 눈빛이, 실수로라도 내 어깨에 잠깐 머물렀으면 하는 그녀의 손끝이, 그리고 죽어서라도 함께 포개졌으면 하는 그녀의 입술이 언제나 내 여름의 처음을 가슴 뛰는 상상으 로 가득 채우곤 하였습니다. 찬바람이 일어 다시 그녀의 하얀 팔이 긴 소매 사이로 들 어갈 때까지 말 한 마디 못 붙여 보지만 내 여름의 처음은 늘 행복했습니다. 철쭉이 굳이 봄의 끄트머리에 피는 것도 이를 알기 때문인 듯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