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꽃

 

희한하게도 봄꽃나무는 꼭 잎이 나기 전에 꽃이 핍니다.
북쪽에선 아직 동장군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3월
하늘에 눈을 뿌리는 심술을 부리고 있을 즈음 이미 남쪽에
선 매화가 꽃잎을 내밉니다. 땅속에서는 벌써 연잎이 거친
흙을 비집고 나서려 하지만 아직 땅 위엔 초록을 찾기 어
려운 때 부드러운 산자락을 온통 하얗게 물들이는 매화,
눈부신 탄성을 듣기에 충분하지요. 그 매화가 지기 시작하
면 마당가의 산수유가 노란 눈을 뜨고 나옵니다. 그리고
아직은 찬 기운이 좀 묻어 있는 햇살이 담벼락을 오르내릴
때쯤 산수유 여린 꽃 색에 덧칠이라도 하듯 개나리가 샛노
랗게 피어납니다. 역시 파란 잎은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노란색 개나리는 ‘따뜻함, 행복, 희망’과 같은 색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텁고 우중충한 겨울을 밀쳐내고 밝고 화사
한 봄이 들어서고 있음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계절의 전령
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3월이 다 지나고 나면 ‘부지
깽이도 땅에 꽂으면 잎이 돋는다’는 청명(淸明)이 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못다 한 이야기를 하듯 앞다투어 나뭇가
지에 잎이 돋을 즈음엔 또 벚꽃이 화사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 이 역시 꽃잎을 먼저 내미는 것입니다. 4월초 남해안에
서부터 시작한 벚꽃은 하루에 30km 정도씩 북으로 내달
려 중순 무렵이면 서울에까지 개화가 시작됩니다. 벚꽃은
보통 첫 잎을 내민 지 일주일 정도가 되면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낮밤없이 상춘의 가슴 설렘으로 우리를 들뜨게 하
고 눈보라 같은 사랑을 온 천지에 쏟아놓곤 합니다.
그러나 차가운 겨울바람에 시위를 하듯 화사한 꽃잎을
먼저 내밀었던 봄꽃나무들, 파란 잎이 돋고 가지가 무성해
지면 사람들은 언제 그 아름다운 개화에 탄성을 질렀냐는
듯 어느 것이 매화이고 어느 것이 벚나무인지 구별도 하지
못하거나 아예 관심조차 주지 아니하기 일쑤입니다.
오늘도 하루 종일 내 전화기 아무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나 또한 이미 꽃 다 지고 잎만 무성한, 아무의 관심에도 없
는 봄꽃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