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로 가는 길목

 

저녁 어스름은 너무 빨리 짙어져서 바닥에 떨어진 동전
을 찾는데만 어려운 게 아니라 사람을 알아보는 데도 조심
해야 할 일입니다.
퇴근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생머리의 여자 뒷모
습이 분명 같은 회사 미스 리였기에 또 그 위험한 장난기
가 도져 살짝 다가가 뒤에서 두 눈을 가렸습니다. ‘누구
야’ 하고 앙칼지게 돌아서야 맞을 그 여자, 그런데 아무
반응 없이 내 손에 묻어나는 것은 눈물이었습니다. 사태
수습이 곤란하다 판단되는 이 황당한 상황에 나를 돌아보
는 그 사람의 눈빛은 낯선 겨울 색이었습니다.
지지리도 못사는 가난한 산골에서 올라왔고 아버지가 일
찍 돌아가신 탓에 동생들이나마 공부시키려고 낮일 밤일을
가리지 않고 고생하고 있는데 오늘 갑자기 홀어머니가 쓰
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열 살, 일곱 살,
줄줄이 남은 동생은 어떡하고……. 만나지 않아도 좋을,
좀 비켜가 주었으면 좋을 반갑잖은 운명이 왜 자기에게만
졸졸 따라다니는지 억울해 죽겠다는 그 여자, 아무리 뜯어
봐도 남이 아닌 것 같던, 언젠가 기회가 되면 소설을 한번
써 보고 싶다던 그 사람,
그 날 정류장 옆, 문 잘 안 닫히는 소주 집에서 생전 처
음 내 손에 눈물을 묻힌 그 여자와 주고받은 푸념이 그리고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젊은 객기로 친구에게 돌려주어
야 할 작은 봉투 하나를 슬쩍 밀어놓고 일어선 날, 그 날도
지금처럼 겨울로 가는 길목의 어둑한 11월이었습니다.
아직도 내가 가끔 어깨 밑으로 시린 바람이 드는 날이면
서점에서 소설책을 기웃거리는 것은 어쩌면 생머리의 그
여자가 이제는 자랑스런 이름을 달고 어느 즐거운 책 속에
서 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을지도 몰라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