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동의 시 세계

카타스트로피 현상을 통한 현실과 서정의 변증법
-- 시집 『아름다운 결핍』을 중심으로 --

최운선 (문학평론가, 경기대 교수)

1. 들어가는 말 - 김승동 시인에 대하여

진실에 대한 고집스런 성실은 하나의 위대한 창조가 된다.
대개 시인들은 시작과정에 들어서면 언어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시는 처음 생각한대로 써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시에는 현실과 괴리가 생길 수 있고 시인의 의도와는 달리 관념적, 추상적으로 불투명해 지기도 한다.
여기서 진실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김시인에게 있어 진실이라는 세계와의 치열한 다툼이 아마도 김시인 특유의 시적 창조의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시인은 자신의 시적 내면세계에서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 나서는 용감한 시인이다.
무시로 불어오는 흔들림의 바람 속에서 어둠의 실체를 보았고, 그 실체에서 자신이 걸어갈 수밖에 없는 숙명적 길임을 깨닫고, 자신의 평생을 몸담기도 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이제는 순수함이나 진실만을 찾는 위대한 시인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 그래 가자/ 그리고 미련을 두고 남아 있을 게 무엇이나/
/ 길은 떠날 길이다마는/ 등 떠밀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 저 맑은 자유와 기회의 나라로/ 힘차게 들어서는 것이다/
─ <퇴출> 부분


2. 내면적 서정성과 순수 의지의 표출

꼬기꼬기한 날들이 보따리마다 고통으로 숨어 있고 그 고통과 갈등에 이은 극복은 언제나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빈틈없이 논리적이고 빈틈없이 지성적으로 우리를 압도시키고 있다. 시인이 자기 자신을 즉 자기 체험의 모든 것과 자기 현재를 규명하게 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조명하는 데 조금도 빈틈없이 그 노력을 해온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김시인의 시에서 진실 찾기가 된다.
타당하고 정당한 것이 어렵게 보여질 때, 그것이야말로 가장 쉬운 작품이지만 과연 그 어려움이 가장 타당하고 정당한 것이었나 하는 물음은 시인 자신이 줄기차게 풀어 나가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거친 손바닥이
어른들은 다 그런 줄 아는
일곱 살 짜리 입학식 예비소집에서
맞은편 37평 아파트와 줄 따로서는
엄마의 목젖에
설움이 은하수처럼 흘러내리는
그런 미리내 마을에 산다.
─ <미리내 마을> 부분

우리 인간들의 삶은 그 자체로 주어진 것이어서 영구 불변적인 요소가 아닌 늘 외부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한다. 절대적 가치나 진리의 속성보다 상대적인 기준에 의한 평가받기 마련이다. 이러한 우리 인간의 존재는 항시 원리적 모순을 안고 있다. 그 모순의 극복을 삶의 과정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기를 바라보는 내면세계의 서정 찾기 방법이 되는 것이다.

너무나도 태연한 오늘이
또 가난으로 당신을 맞고 있는데도
땀내 배인 소매 끝 고치시며
긴 이랑에 몸을 낮추십니다.

여윈 등 아래로
덕지덕지 아픔이 묻어난
호미자루 만지시는 손
꽃도 숨을 죽인 채
향을 내지 못합니다.
─ <어머니> 부분

어머니의 삶은 진실이다. 밤새 돌아누워 고통이 짓눌러도 그 속에서는 단단한 자식에 대한 사랑이 맺혀 있고, 이러한 모습을 관조적 자세로 응시하고 있는 구체적 자아의 눈은 현실적 의미를 추구하려는 자세가 자기 자신의 내면을 감상이나 절망에 빠지지 않고 솔직성, 즉 진실성 그 자체로 드러나 보이는 관조적 서정의 세계가 된다. 그것이 의지의 미학으로 표출돼 나날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시인이 그 살아있음에 갈망하여 참되고 순결한 생명력으로 빛남을 우리는 그의 시 <달빛나라>에서 느낄 수 있다.

푸른 자정이 문을 엽니다.
달빛이 낮은 걸음으로 다가섭니다.
당신의 나라에 들기 위해
언 땅에 내린 낙엽 한 무덤
꽃을 만들고 있습니다.

강가의 물푸레나무 숨을 잊었고
새벽의 이정표는 옷을 벗은 채
당신의 가슴에 순정 같은 고요를
뿌리고 있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을 자유가 없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유가 있는
이 어둠이 섞인 나라에서
당신을 마음껏 소유합니다.
─ <달빛나라> 부분

우리의 전통적인 상상력에 의하면 달빛 그 자체가 서정이 된다. 그러나 달빛나라는 김승동 시인에게 의지적 미학의 건설현장이 되었다. 어떤 실천적 행위나 결단, 그리고 여간한 신념이 아니고서는 이루어갈 수 없는 행위는 삶에 건강한 표현방식이며 순수한 내면이 구김 없이 표현된 진실 내지 순수가 되는 것이다.


3. 카타스트로피 현상과 변증법적 대위

카타스트로피란 그리스어 katastrophe에서 온 말이다. 사전을 보면, 돌연히 나타나는 광범위한 큰 변동, 가령 전쟁에 의한 재해 같은 것, 파국 또는 종말이며, 흔히 불행한 것, 불상사, 영화나 연극에서는 마지막 장면, 지각의 변동, 격변, 카타르시스 등이 있다.
수학에서 사용되는 카타스트로피 이론은 불연속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정상적 언어인데, 필자는 시에 있어서 전, 후절로 분단될 때 나타나는 불연속적인 현상에 주목하고, 이를 카타스트로피 현상으로 보고자 한다.
시에서 나타나는 카타스트로피 현상의 효과는 조윤제 박사의 이론에 따르면 시가의 내용상으로 전후 절의 관계를 보면 한 수의 시가는 전 절에 있어 대체적인 의미가 종결이 되고, 후절은 다만 전 절의 반전, 강조와 같이 생각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현대시에 나타나는 전, 후절 분단성은 의식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자연히 흘러나오는 표현이 이러한 형태와 맞아들어 갔고, 이 자연적 표현 형태가 가장 논리적인 표현방식에 부합된다고 한다.
내용이 연속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나타나는 평탄성을 깨뜨릴 때 전, 후절 사이에는 불연속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독자에게 묘한 극적 충격을 주며, 한편의 시에 입체성 및 전체성을 얻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요컨대 카타스트로피 현상은 Surprising turn이나 Surprising ending의 경우에 나타나는데 이 카타스트로피 현상을 통해 김승동 시인의 현실과 서정의 변증법적 대위를 살펴보면 김시인의 시 전체는 긍정적인 가치평가로 나타난다.

저 살찐 파도를 못 잡아먹어
으르렁거리는 모래톱

저 하얀 알몸을 덮치지 못해
안달이 난 파도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
입 맞추고 서 있는 두 사람
─ <연 인> 부분 이 작품에서 1연과 2연은 매우 험난하고 무시무시한 현장이다. 그러나 3연에서 감미로운 사랑이 흐르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극적 긴장이다. 절실함 속에서 승화된 사랑 극단적으로 상반된 공포와 협박 속에서 극복된 우리의 모습, 즉 1,2연에서 현실에 대한 압박 시련이 3연에서 순간적인 사랑으로 처리되었음은 바로 현실과 서정의 변증적 대립으로 나타난 카타스트로피 현상이 된다. 이러한 시적 긴장은 김시인의 작품인 /늦봄에/ /풀/ /열두개울/ /아내의 청바지/ 등에서도 계속 나타나고 있다.

보문사 석실 앞마당에 오래된 향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그 붉고 찰진 속살은 다 내어준 채 꺼칠한 모습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것을 보면 뿌리는 저만치 대웅전 밑에 두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이따금 바닷바람이 헉헉거리며 올라와 방금 말린 소금기를 가슴에 대면 둥둥거리는 설레임이 일어나 좌정을 못하는 것을 보니 범종각 쪽에 뿌리를 튼 것 같기도 하고 또 속절없는 세상 사람들이 꾹꾹 우겨 넣어준 시멘트 속살에 숨이 막히는지 산 벚나무 가지를 물고 바람이 내려와도 향을 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목탁 소리에 향불 오르는 석 쪽인 것 같기도 하다. 세월이 지나도 머리가 파랗기만한 보문사 향나무 앞에 서서 하루종일 뿌리를 찾다가 오동나무 꽃잎 지는 소리만 듣고 내려왔다.
(필자 내용상 재구성) ─ <늦봄에> 부분

인간의 정신적 깊이를 추구하다가 인간의 정신적 높이를 표현할 때 카타스트로피 현상이 발생한다. 이 깊이와 높이의 대립된 정신세계의 공존이 초래하는 카타스트로피 현상은 /늦봄에/이라는 인용시에서는 관념을 제거하기 위해 서술적 이미지를 그 기법으로 하고 있다. 순수시는
<감정의 절제>와 <탈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그 장점이 있다면, 감정의 절제로 인해 난해하게 되기 쉽다는 것, 관념의 제거로 인해 입체적인 사물이 평면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어 사물의 깊이를 빼앗기게 된다는 것을 그 단점으로 들 수 있다. 결국 외부공간묘사와 내면공간묘사의 공존, 비유의 사용에 의해 시가 입체성을 지니게 되어 순수시로서는 실패했을지 모르나, 효과면 에서는 오히려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늦 봄에 라는 작품에서 카타스트로피 현상은 성공적인 효과를 지닌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지러이 널린 파선에
지겨운 목숨 하나 안간힘을 쓰지만
무심히 스치는 쾌속선은
젖은 체온을 내리고 갈 뿐

아름다운 빛은 반어가
무거운 바다의 지붕을 덮어 나오고
속옷이 얇은 이들이
황홀한 밤바다의 향연을 준비하는데
그 한 귀퉁이
용케도 침몰하지 않은 무각형의 항변 하나가 희망으로 출렁인다.
─ <희망이 표류하는 밤> 부분

이 작품은 외면 풍경이 평면 위에 전개되고 있다. 아주 명확하고 단순한 풍경이나 이 작품에서 희망으로 이르는 극복과정을 읽어내고 받아들이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의식하는 의식을 한 번 더 의식하는 일은 분명히 이론과 학문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서술되는 자아>와 <서술하는 자아>, 그리고 <다시 서술하는 자아>를 표현하는 서술 방법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회의하는 방법으로는 더욱 치열한 것이 될 수 있음에도, 그것이 <처음으로>한 작품에서 실현된 까닭인지, 역시 전달에서의 많은 어려움을 보여주었고, 그 어려움은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더욱 용기를 갖고 살아가려는 외면적 공간과 내면적 공간의 대립에서 보여준 의식적 영역의 확대이다. 즉 사물의 의미가 깊이를 획득하여 시에 입체성을 주고 있다는 변증
적 대위는 시인에게 있어서 현실과 서정의 대립이며 이러한 것들이 김승동 시인에게 나타난 카타스트로피 현상의 효과적 시적 처리 능력이 된다.

4. 진실성 그리고 그 빛깔과 향기

우주적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인간의 존재란 한없이 미미할 따름이다. 무엇의 다함이나 이룸들은 광년에 비하여 겨우 몇 초에 지나지 않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 지경에 이르면 잘나고 못나고 잘하고 못하고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질 수 있는 것은 안으로 안으로만 익는 순수함이나 진실함밖에 없다. 그리고 그 빛깔과 향기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야 제 빛을 발한다. 그것은 성숙이다. 그리고 시간이 경과하여도 일회성 아닌 영원성 즉 시인이 공유한 뜨거운 예술혼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참된 삶의 가치 기준은 무엇인가? 다음 시를 읽어보면 그 해답은 스스로 얻게 된다.

만져만 보아도 잠이올 듯한 꿈결 보다 더 보드라운 밍크 롱코트 157만원, 지그시 웃음을 지어 보지만 마흔 중반의 나이에도 표정이 쉽지 않다. 날렵한 허리까지 받쳐주는 밤색 밍크 하프코트 115만원, 도대체 나도 이 나라의 국민인지 그 알량한 갑종 근로소득세에 차 오르는 분노를 꾹 누르며 돌아서는데 구석진 자리에 칙칙한 무스탕 반자켓 하나 49만 9천원의 이름표를 달고서도 보란 듯이 내게만은 당당하다.
오늘도 별 수없이 내려갈 길 밖에 없는 8층에서부터 아내의 해진 외투 같은 백기를 들고 간다.
─ <백화점에서> 부분

사랑의 온갖 행위와 업적은 소위 허위의 소산으로서 이것들이 연속으로 성립하는 역사는 긍정적 의미도 허용될 수 없는 죄악의 누적이 된다. 진정한 삶의 원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굴욕적인 삶의 절망만을 극복하는 순수, 이는 생명체로서 부끄러운 일로 여기는 불쾌감이며 자신들의 생활공동체를 지키려는 빛깔과 향기가 된다. 이런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공허함 그리고 과장이나 허세가 조금도 없는 인식을 일련의 패배 혹은 좌절을 매개로 하여 정신적 세계를 완성하려는 비극적 삶의 인식과 그 초월로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진실된 빛깔과 향기가 김시인에게 존재할 때 그의 시는 더욱 값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