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동의 시 세계

내면공간의 아름다운 조형(造形)
-- 시집『외로움을 훔치다』을 중심으로 --
이 근 배 (재능대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이 땅의 봄은 시로부터 꽃피운다.

모국어는 긴 겨울에도 잠을 자지 않고 피를 끓이다 깨어나 오래 준비했던 말들을 산과 들에 풀어놓는다. 이처럼 아름답게 피어나는 모국어의 꽃밭에서 나는 김승동 시집 「외로움을 훔치다」를 읽는 기쁨을 얻는다.

김승동 시인의 시의 발걸음을 나는 10년 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시인으로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서두르지 않고 오직 이 땅의 시가 가꿔온 대지에 새로운 꽃씨 하나를 심어보겠다고 생각과 마음을 쏟아 붓는 그 순열(純烈)을 엿볼 수 있었다.

불알이 내려앉도록 매서운
북풍에도
꼼짝 않고 서 있더니
댓잎을 가르는
시린 눈보라에도
이 악물고 버티더니
기어코 살갗이 터져
밤새 울고불고 지랄을 하더니만
오늘 아침 살포시 벙근 매화꽃
- 「이쁜 년」에서

제목이 <이쁜 년>인 이 시는 조선조의 선비나 여인네들이 눈바람 속에서도 피어나는 매화를 정절의 상징으로 무수히 노래했던 오브제를 리메이크 한 것이다. 그런데 생판 맛이 다르다. "불알" "지랄"같은 막말을 써서가 아니라 <이쁜 년>의 제목 속에 감추어둔 오감을 자극하는 분냄새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곧 옛 사람들이 일러온 지조나 절개에 기울지 않고 저자거리에 핀 밤의 꽃쯤으로 빛깔과 향기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상큼한 한 편의 시를 낳기까지 김승동 시인이 견뎌온 "시린 눈보라"가 어찌 없었으랴
김승동 시인은 소나무 같은 사람이다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사람, 폭풍이 오고 눈보라가 와도 끄떡없고 푸르름을 잃지 않는 사람, 뿌리를 깊이 박고 있어 바위도 뚫는 사람, 그런 김승동 시인이 시에서는 사뭇 다르게 불꽃을 뿜는다. 청솔 가지가 불이 붙으면 더 큰 소리로 타듯 그렇게,


새 옷 꺼내 입고
머리도 좀 만지고
눈가의 주름도 살짝 털어 내며
여의도 윤중로로 나간 날
꽃 반 사람 반 만나
맞선을 보았는데
봄 밤 깊도록
꽃 멀미에 취해 쏘다니다가
돌아오는 길에 잡은 손을 당겨보니
그 많은 꽃 중에
아침에 같이 나간 꽃이었다
- 「맞선」에서


아무리 파헤쳐도 바닥이 닳지 않는 시의 오브제는 "사랑"이다. 사랑 가운데서도 이성간의 탐험은 가파르고 위태로울수록 절정을 느끼게 된다. 윤중로에 벚꽃을 보러갔다가 맞선을 본 여자 "봄 밤 깊도록/ 꽃 멀미에 취해 쏘다니다가" 돌아오는 길에서야 "아내"임을 알게된다. 이렇듯 김승동시인의 화법은 낮고 소리나지 않는 반전으로도 시적 감흥을 한 층 더 높이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꽃들 속에서 꽃을 만나기, 낯선 여자 속에서 아내 찾기, 아내 속에서 애인 찾기, 이런 관능의 탐험에서 그의 시는 심해어를 낚아 올리듯 우리에게 신선한 쾌락의 비린내를 선사한다.


간간이 적막이 묻은 숨소리 오갈 때 봉긋이 솟은 조약돌이나 석류 속보다 말간 그의 가슴이 새벽이면 쏟아져 내릴 찬 서리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살짝 입술을 덮어 준다는 것이 그만

- 「외로움을 훔치다」에서

서로의 눈물과 이름도 물어볼 것 없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
달콤한 타액과 미끄러운 점액질에 뒤범벅이 되어
정신 없이 서로를 읽어버리는 것
그러다
나의 껍데기는 모두 강물에 던져 버리고
알맹이만 그것도 반들반들한 알맹이만 가지고
밖으로 나오는 것
- 「당치 않은 꿈 Ⅰ - 일탈」에서


늘 꼿꼿한 자세로 흐트러짐이 없는 김승동의 삶의 자세, 그리고 맵고 찬 겉모습만 보다가 그의 시를 보면 아하 시인이란 바로 눈보라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 같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I, A 리챠즈가 "시는 내포성"이라고 일컬었듯이 시인에게 있어서 그 내면의 공간은 무한한 것이다. 내면에 들끓는 무수한 욕망의 거품들을 어떻게 삭히어 시로 조형해내느냐에 시적 성과가 결정된다.

그 내면의 노출은 두려운 일이다. 아름답게 터뜨려야 한다. 뭇 사내를 홀리는 <이쁜 년>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만의 비법이 있어야 한다. 김승동은 내면의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구도를 정확히 잡고 있다. 노출의 긴장을 언어로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에도 익숙해 있다.
새로 입문하는 시인들이 저지르기 쉬운 유파를 따라잡기나 관념적 서술의 남용이 없이 내면의 사유를 다소곳이 천착해 가는 김승동의 시법은 새로운 청량제가 될 것이다. 한국시단에 새 순을 더하는 사화집의 상재(上梓)를 경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