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앓이
곳집 가는 언덕 길 그 집 앞 들국화 활짝 피면 조그만 가슴에도 붉은 물이 들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무서운 곳집을 오가며 행여 그 아이 단발머리 보일까 사립문 밖에 서서 까치발을 들었지만 언제나 댓돌 위에 하얀 운동화만 보고 왔습니다 그 집 마당가 오동나무 하나 둘 잎이 지고 불알 같은 열매 마저 떨어지고 나면 가슴속에 열꽃이 시리도록 피었습니다
공원 길 옆으로 늘어선 은행나뭇잎 노랗게 지면 굳은 살 박인 가슴에도 온통 가을이 쏟아집니다 지금은 오고 갈 곳집도 없고 한 줌 꺾어 쥘 들국화도 없지만 아직도 하얀 그 아이의 운동화 댓돌 위에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 집 마당가 오동나무 없어 때는 잘 모르지만 저녁나절 내내 가슴에 열꽃이 돋는 걸 보면 또 겨울이 오려나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