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곳이 없다

 

눈부신 햇살은 내게 치명적이다
그것이 고운 직선으로 더구나
제법 물기를 머금은
여름 햇살이면 더욱 그러하다
늦은 유월에 핀 검은 장미나
스치는 바람 몇 줄기에 눈이 멀어
꽃잎을 다 내어놓고 마는
속없는 코스모스마저도
그의 빛나는 광채 앞에 몸둘 바 모른다면
내겐 더 이상 선택이 없다
그저 푸르게 무장한 숲 속으로 뛰어들 일
컴컴한 어둠이 이미 내겐 화려한 일상인 것을
감출 일도 없다
그러나 프리즘의 집요한 수색과
한 올 한 올 섬세히 파고드는
하얀 빛 줄기를 끝내 피하지 못한 채
나는 언제나 눈부신 우익전향을 서약하고
숲에서 끌려 나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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