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가는 날

 

속이 깊어 더 푸른 김씨네 방 반쯤 묻힌 창에 녹슨 대 문을 빠져나오다 헤진 햇살 조각들이 뒷걸음질친다. 오 늘은 특별히 동쪽에서 해가 오른 아침, 창틀아래 부서지 는 먼지의 편편쯤이야 섣달에 내리는 첫눈만큼 반가울 뿐이다. 취기로 녹여 내던 퀴퀴한 곰팡이 냄새도 오늘은 시장기로 단맛이 돈다. 한 귀퉁이는 늘 흑백시위를 하던 텔레비전, 밤마다 두껑없이 덜컹대던 세탁기도 오늘은 신이 나는지 군소리가 없다. 그저 늘어난 새치만큼 가짓 수만 많아진 보따리들만 여기 저기서 웅성거린다. 보름 이면 달빛 빠져 같이 자던 방바닥에 아픔이 말라붙고 언 발이 녹던 자리에 속눈썹이 떨어진다. 반 트럭 하나 겨우 접어든 골목에선 메케한 살림들이 모처럼 만 난 햇볕에 서로 머리를 내미느라 넘어지고 엎어져도 울 음소리 하나 없다. 주인집 아저씨의 목청 좋던 잔소리도 난간에 걸렸다. 해마다 돌아오는 그늘진 자유에도 가족 소풍이나 된 듯 날뛰다가 깨뜨린 항아리 조각 앞에 두 눈이 똥그래진 아이들, 그러나 오늘은 아픔이 있을 수 없다. 누런 얼굴에 핏기를 세우던 아내도 물빛 웃음뿐이 다. 옹색하게 쭈그린 계단 옆에 과감하게 버려진 손때묻 은 잡동사니들, 아내가 저린 가슴을 포장하던 개어진 손 거울, 그리고 방안 가득 네 식구가 여름내 눈물로 그리 던 푸른 이끼의 비구상 벽화 한 폭,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지만 김씨는 행복하다. 오늘밤은 이층에서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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