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어도 얼음 꽃이 피는 날 백화점에 갔 다. 만민이 평등한 동토의 나라에서 펄럭이던 붉은 깃발 이 2열 종대로 늘어서서 '살래(SALE)살래'를 외쳐대 고 있다. 그래 산다. 살 거다. 왜?

기세 당당하게 육중한 유리문을 박차고 들어가려는데 한발 앞서 스르르 자동문이 김을 뺀다. 휘황한 불빛에 적당히 데워진 산소에 오늘도 내 눈동자와 어깨는 기선 제압에 실패하고 말았다.

산모의 소유권이 무시되는 앙계장의 계란 선별기 같은 에스컬레이터는 침묵까지도 정확하게 무게를 골라내며 화려한 산데리아가 빛나는 스카이라운지까지 자유경제 의 충실한 신봉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나는 몇 등급일까? 오늘은 대란(大卵)이고 싶다. 첫 번째 칸에서 간단하게 골라내어지는 보잘것없는 소란 (小卵)이고 싶진 않다. 푹 꺼진 아랫배에 힘을 주고 점 점 말라 가는 발목과 손목에 악력을 다하면서 2층도 3 층도 5층도 넘어 섰다. 이제 6,7층에만 밀려나지 않으 면 된다. 출산의 고통이 선혈로 묻어 얼룩진 에스컬레이 터 모퉁이를 잡고 끝내 무지개 조명이 춤을 추는 특설매 장으로 올랐다.

만져만 보아도 잠이올 듯한 꿈결 보다 더 보드라운 밍 크 롱코트 157만원, 지그시 웃음을 지어 보지만 마흔 중반의 나이에도 표정이 쉽지 않다. 날렵한 허리까지 받 쳐주는 밤색 밍크 하프코트 115만원, 도대체 나도 이 나라의 국민인지 그 알량한 갑종 근로소득세에 차 오르 는 분노를 꾹 누르며 돌아서는데 구석진 자리에 칙칙한 무스탕 반자켓 하나 49만9천원의 이름표를 달고서도 보 란듯이 내게만은 당당하다.

오늘도 별 수 없이 내려갈 길밖에 없는 8층에서부터 아내의 해진 외투 같은 백기를 들고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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